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마우리아 왕조 (문단 편집) == 문화 == ||[[파일:Great-Stupa-Sanchi-India.jpg|height=300]]||[[파일:800px-Asoka̠_Buddhist_Missions.png|height=300]]|| ||산치의 대(大) 스투파||마우리아 왕조 시기의 불교 전파 경로|| 마우리아 왕조가 역사상 처음으로 인도 아대륙 전체를 정치적으로 강력하게 통일하면서 교역이 흥성해지자 인도는 상당한 수준의 경제 발전을 이룩할 수 있었다. 이전까지 수 백개의 소규모 왕국과 제후국들, 토후국과 군벌들이 조각조각 나뉘어 국경을 닫아걸고 허구한 날 전쟁을 치르며 약탈과 방화를 반복했던 반면, 마우리아 왕조 시기의 인도에서는 자유로운 무역과 통행의 자유가 보장되었던 것이다. 특히 아소카 대왕은 혼란스러운 정치 상황을 바탕으로 길거리에 쏘다니던 강도들과 사병들을 진압하는 데 큰 노력을 쏟았고, 인도의 상인들은 옛날보다 훨씬 안전하게 이곳저곳을 돌아다닐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인근의 유력자들과 군사적으로 경쟁하거나 군비를 추가적으로 확충할 필요도 없었으니 농민들에게 물리던 세금이 낮아진 것은 당연지사. 물론 여전히 고세율이었고 지역에 따라, 그리고 토착 토후들의 마음에 따라 세율이 천차만별이긴 했으나 [[아소카 대왕]] 이래 자비와 긍휼이라는 불교적 덕목을 강조하면서 인도의 세율은 전반적으로 상당히 낮아진 편이었다고 한다. 세율이 낮아지니 경제적 교류와 무역, 그리고 시장이 폭발적으로 커졌고, 마우리아 왕조 치하의 인도인들은 경제 호황을 누렸다. 국제 무역도 증가했다. 마우리아 왕조는 존속 기간 대부분 동안 서쪽의 그리스계 왕국들과 우호 관계를 유지했다. 때문에 마우리아 왕조 내부에서는 서쪽에서 건너온 진기한 지중해권의 문물들을 자주 찾아볼 수 있는 편이었다. 파키스탄과 아프가니스탄을 잇는 험준한 산악통로, 즉 카이버 패스를 중심으로 서양권과의 교역이 이루어졌다고 한다. 그리스의 상인들은 그리스의 [[올리브]], [[도자기]], 페르시아의 값비싼 사치품들 등을 가져다 팔았으며, 인도의 상인들은 이들에게 인도의 향신료, 비단, 이색 물품, 금괴와 은괴 등을 그 대가로 수출했다. 마우리아 왕조는 서구 세계 뿐만 아니라 [[말레이 반도]]의 동남아 쪽 소왕국들, 심지어는 히말라야 너머 중국과도 무역을 전개했다고 알려져 있다. 이처럼 마우리아 왕조는 수많은 국가들과 무역을 전개했고, 후기에 이르자 기본적인 형태의 민간 소유의 [[기업]]들이 등장할 정도로 경제구조가 발전할 수 있었다고 전해진다. 건축 방면으로도 많은 유산을 남겼다. 가장 대표적으로 현대 인도의 국장에도 들어가있는 '아소카의 기둥' 머리부분을 장식했던 유명한 사자 석상이 바로 이 시기에 만들어진 것이다. 우리에게 친숙한 3마리의 사자들이 서로 다른 곳을 바라보는 모습의 사자 석상은 사르나트의 폐허에서 발굴한 석상을 복원한 것으로, 3마리가 아니라 1마리가 올라가 있는 것도 있다.[* 참고로 아소카 대왕은 각지에 40여 개에 달하는 기둥을 세웠으나 남아있는 것은 손에 꼽을 정도로 적다. 가장 보존 상태가 좋은 것은 비하르 주에 위치한 기둥.] 아소카의 기둥들 외에도 이 시기에 축조된 스투파들도 유명한데, 대표적으로 산치의 거대한 스투파가 있다. 거대한 돔, 즉 반구 형태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 안에 부처의 사리나 고승들의 사리를 넣어 봉안했다. 돔 주위는 정교한 장식을 새긴 석조 울타리와 탑문들로 장식했다. 이 스투파들은 마우리아 특유의 기하학적 조형성과 아름다움으로 유명하며, 때문에 마우리아 건축을 이야기할 때는 아소카의 기둥과 스투파가 필수적으로 들어간다. 초대 찬드라굽타는 [[자이나교]], 2대 왕 빈두사라는 [[힌두교]], 3대 왕 아소카 대왕은 [[불교]]에 귀의했다. 이런 것을 생각하면 이 시대는 확실히 종교의 자유가 보장되며 발전할 수 있었던 시기였다. 아소카 왕은 왕자를 이웃 나라 [[스리랑카]]으로 보낸 일을 비롯해 [[상좌부 불교]]를 [[동남아시아]]에 전파하였다. [[대승 불교]]와 [[상좌부 불교]]에는 차이가 있었는데, 대승 불교는 중생의 구제를 중요시하였고, 상좌부 불교는 개인의 해탈을 중요시하였다. 인도 불교의 대표적인 유적지 중 하나인 산치 불교 유적도 마우리아 왕조 시기인 [[기원전 3세기]]에 만들어졌다. 건국 초기부터 그리스인들의 영향을 받아 세워진 왕조답게 마우리아 왕조는 [[셀레우코스 왕조]], [[박트리아|그리스-박트리아 왕국]] 등 [[헬레니즘]] 문화권과의 교류 역시 매우 활발했다. 기원전 305년에는 셀레우코스 왕조의 창립자인 셀레우코스 1세와 결혼동맹을 맺었고,[* 말로만 동맹이지만 사실상 패배선언이었다. 셀레우코스 왕조는 이 동맹을 기점으로 인더스 강 동편에 대한 영유권을 모조리 포기한다.] 셀레우코스 1세는 딸과 아프가니스탄, [[발루치스탄]], [[힌두쿠시 산맥]] 등을 포함한 막대한 영토를 마우리아 왕조에게 고스란히 넘겨주었다. 참고로 찬드라굽타는 그 대가로 500마리의 코끼리를 친선의 의미로 셀레우코스 1세에게 넘겨주었다. 어찌되었든 알렉산드로스 대왕 시절 인도로 건너온 그리스인들은 아소카 대왕의 시절까지 나름의 공동체를 이루며 인도 북서부 지방에서 잘 살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심지어 아소카 대왕의 칙령에도 그리스인들에 대한 언급이 나오며, 이후에도 박트리아의 왕인 에우디메데스 2세와 친선 관계를 갱신했다는 말도 있다.[* 멸망할 즈음 되면 박트리아의 내분으로 인해 [[인도-그리스 왕국]]이라는 인도-헬레니즘 문화가 융합한 나라도 나온다.] 아소카 대왕은 이같은 친선 관계를 이용해 그리스와 지중해권에 불교를 포교하기 위한 사절단들도 대거 보냈다고 알려져 있다. [[분류:아시아의 황제국]][[분류:인도의 역사]][[분류:네팔의 역사]][[분류:인도-네팔 관계]][[분류:기원전 2세기 멸망]]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